도산서원을 마지막을 안동을 떠나 영주로 향했다.
원래의 목적은 이번 기행이 목적이 한국의 유교문화를 찾아보는 것인만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주까지 와서 부석사를 보고가지 않으면 아쉬워할 것 같다는 판단에 기행코스에 '부석사'가 포함되었다.
부석사를 향해 가는 길에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은 기어이 빗방울을 뿌렸다. 걱정과 함께 지난 밤 뒷풀이 공간에서 이욱선생님께서 '비내리는 부석사는 또다른 맛을 준다'라는 말에 위안(혹은 기대)을 삼았다.
잠깐 눈을 붙였더니, 어느새 부석사 주차장이다. 시간도 한시간여 지나 있었다. 어느새 빗방울은 더 굵어져 있었다. 주차장 근처의 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부석사로 향했다.
14:30 안내소(매표소)를 지나 사과 과수원 사이길을 걸어 올랐다.
최근 생긴것 같은 '태백산부석사'라 적힌 일주문을 지나,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를 지나 부석사의 입구인 '천왕문'을 지났다.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사의 수사찰이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 혹은 홍교사라 불리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이 무량수전이 제건되고, 우왕 3년(1377) 조사당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선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석조기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안에 봉안된 여래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 소상이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 '태백산부석사' 일주문이라고 봐야하나?
▲ 부석사 당간지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당간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불ㆍ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 시켜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부석사 입구에 위치해있으며 높이는 428Cm이다. 양 기둥에 꼭대기에는 내면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을 그리며 외부로 깍여졌는데 1단의 굴곡을 두었다. 이 굴곡부에서 앞뒷면의 중앙에 종선문이 내려오고 정상부에서 2단의 아름다운 원호가 경사진 형태로 조각되었고, 측면은 3조의 종선문이 있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잎을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이 놓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으로 보아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 천왕문
▲ 부석사 삼층석탑
14:40 봉정루(법종각-법고,목어,운판이 있다. 법종은 조선시대 대원군시절 절 밖을 나갔다왔다 하여 다른 곳에 놓았다한다. 사찰의 사물은 각각 법고는 네발달린 짐승, 법종은 사람, 운판은 날아다니는 것, 목어는 바다생물을 상징한다고 함)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니 문화해설사분이 도착했다. 문화해설사님의 해설을 들으며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을 들러봤다.
▲ 부석사 봉정루(법종각-사물이 있는 곳, 그러나 이 곳에 법종은 없다. 대원군시절 절밖으로 나갔다 왔다 해 따로 놓았다고 한다)
▲ 법고와 목어
▲ 야단법석-강당이 모자라 야외에서 법연을 할때 단을 세우는 쓰인다고 한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사로 국보5점과 보물5점 등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다고 한다.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으며,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의 연대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이었다. 무량수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 안양루
▲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국보18호)
이 건물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보처없이 화엄도량에 서방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주심포 양심의 대표적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고려 현종 7년(1016) 원율국사(964~1053)가 중창하였다. 1916년 실시된 해체공사때 발간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명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2년(1376) 다시 지었다고 되어있다.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갈고 단청을 하였으며, 1969년에도 보수하였다.
건물 천장부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외관의 세련된 풍모와 아울러 한국건축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부석사 석등
부석사 석등(국보 17호)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등으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 측면에는 안상을 2개씩 배치되고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팔각의 가운데 기둥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불을 밝혀두는 화사식 사면에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상이나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손꼽히고 있다.
연꽃 하대석에 조각된 8엽 목판 연꽃의 철단부에 귀꽃의 장식문이 부착되어 있다. 제작연대는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 부석
부석
신라 문무왕 1년(661)에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스님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산 뒤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한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피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 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 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 하여 '부석'이라 불렀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래윗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들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신용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안양루에서 바라본 풍경
부석사는 전체적으로는 남서향으로 되어 있고,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그 축을 틀어 남향을 이루고 있다.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여래는 서쪽에 모시어 동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서방정토의 세계관과 왜구로 부터 나라를 지키 호국불교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이 불상은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높이 278Cm, 광배높이는 386Cm이다.
무량수전안 서쪽에 마련된 불단위에 모셔져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손의 모양은 향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모양이 큼직하며 얼굴은 풍만하다. 양쪽 귀는 긴 편이며, 잘록한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조형을 충실히 계승하였지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일면에서 시대적인 양식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조성 시기는 고려초기로 추정된다.
온몸에 금빛이 화려하며,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걸작이다.
안양루에서 부석사가 마주하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니, 많은 시인들이 무량수전앞에서 시상이 떠오르는 이유를 알 듯 했다. 추적추적내리는 빗속에 백두대간 줄기들이 장엄한 한 폭의 수묵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시적상상력이 부족한 나를 탓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에 쫒겨 부석사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시간내서 다시 와야지 하는 맘을 먹으며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버스에 오르고 나니 어느새 16:00, 일요일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걱정됐다. 결국 소수서원답사는 포기하기로 했다. 아쉬었다. 영주는 꼭 한번 따로 와야겠구나 생각을 먹었다.
유교문화답사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행을 해본적이 없어서 일까, 이번 기행은 무척 새롭고 즐거웠다. 경주외에는 경상도쪽을 돌아보지 못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아쉬운것은 사전 강연들을 듣지 못해, 기행에 대한 사전준비들을 못한게 아쉬울 뿐 이었다.
아쉬움속에 1박2일의 '공감아카데미 가을역사기행'은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