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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行3. 발걸음/경상북도

2009 공감아카데미 가을역사기행 답사기 ⑤ 도산서원

2010/01/04 - [同行3. 발걸음/경상북도] - 2009 공감아카데미 가을역사기행 답사기 ④ 유교문화박물관

유교문화박물관을 출발 10분여만에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산서원은 주차장에서 도보로 5분정도 소요된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중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분들이라면 이이와 더불어 이황선생이 아닐까 한다.(그래서 5천원권에는 이이선생이 1천원권에는 이황선생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런지)

조선의 건국세력인 성리학자들은 절대왕권으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닌, 유교적 왕도정치를 지향했다. 그래서 왕과 유학자들간에는 충성의 군신관계와 더불어 견제의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었나 싶다. 그래서 일까 '사화'는 끊임이 발생했고, 많은 유학자들이 은둔의 생활을 선택하고, 향학들을 통해 지역민들을 유학적 가치로 묶는데 열심이었던 건 아닐까 한다.

이황선생은 영남학파의 대표적 학자다. 정치보다는 학문에 치중 도산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기대승ㆍ이이등의 학자들과의 학문적 논쟁에서 이의 절대적 가치를 풀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도산서원은 이황선생 사후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역락서재의 뒷편으로 건립되었다.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강학과 제학의 공간을 지니고 있다.


문화해설사 선생님과 도산서원으로 걸어들어가다 , 낙동강변에 인위적으로 볼록 나와있는 지형을 만났다.
조선 정조16년 이황선생을 흠모했던 정조가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사림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특별과거인 도산별과를 실시한 장소인 시사단이란다.
원래는 평지였는데, 수해등을 피하기 위해 후세에 높여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에도 도산별과를 기념하여 매년 한시백일장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사시단 앞에서 이황선생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를 듣고, 도산서원내로 이동 농운정사-도산서당-하고직사-광명실-전교당(동,서재)-삼문(상덕사의 정문)-전사청-상고직사-옥진각(박물관)-역락서재순으로 관람하고 나왔다.

▲ 시사단

▲ 농운정사 :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자 모양으로 짓도록 하였다. 공부하던 동편마루를 시습제라 하였고, 휴식하던 서편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 도산서당. 보수공사중이었다.

▲ 도산서당 옆에 매난국죽을 심어놓은 작은 정원. 절우사

▲ 광명실 :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판은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동,서 두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었다. 광명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 준다'는 뜻이다.

▲ 전교당 : 도산서원의 강학기능의 중심

▲ 서재_홍의제 : 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이다. 전교당의 서편에 위치

▲ 동재_박약제 :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이다. 전교당의 동편에 위치

▲ 삼문 : 퇴계이황과 그 의 제자 조문을 모신 상덕사의 정문

▲ 전사청 : 상덕사에서 향사를 지낼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가 있다.

▲ 고직사 :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ㆍ하에 고직사가 있다.

▲ 서원의 경내는 가을이 가득했다

▲ 역락서재 : 퇴계 선생께서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을 비롯한 제자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 도산서원을 둘러싼 산에도 가을이 가득하다.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은 보수공사중이라 온전한 옛모습을 볼 수 는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답사지인 부석사로 이동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나오는 도중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퇴계선생 생존시 도산서당의 주변산수를 그림'의 배경이 된 산수를 즐기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다.

▲ 도산서원을 가시걸랑 천원지폐를 꼭 챙겨서 비교해보시라

12:26 도산서원을 뒤로 하고 부석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