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은 날짜 : 2009년 12월 12일 12:50 ~ 17:50 (총5시간)
○ 걸은 길 :
동대문-동대문문화역사공원-광희문-장충체육관-남산-숭례문-서소문터-서대문터-사직터널-독립문 ○ 함께 걸은 이 : 혼자서
※ 지난 겨울에 낙산-북악산을 연결하는 서울성곽길을 걷고 난 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머지 코스를 다시 걷게 되었다. 출발을 좀 늦게 해서일까 서대문터를 지날 때쯤 이미 해가 져서, 사직터널까지 가서 걷기를 마무리하고 독립문역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인왕산자락에 있는 서울성곽길은 이번 달쯤 걷는 것으로 서울성곽 걷기를 1차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 사진이 많아, 동대문-남산 봉수대 / 남산 봉수대-독립문 코스로 2번에 나누어 올린다.
15:40
봉수대를 출발했다.
지도에 나온 길대로 가려면 서울과학교육관쪽으로 가야했는데, 잠시 딴 생각하느라 남산도서관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래서 안중근 기념관을 지나지 않고 바로 소월길을 따라 SK빌딩으로 내려왔다.
SK빌딩앞 축대는 바로 서울성곽이다.
서울성곽으로 산을 달리다가도 어느 여념집에 축대로, 어느 도로에 축대로, 어느 빌딩에 축대로 아직도 서울시민의 삶과 함께 하고 있었다.
▲ SK빌딩앞 축대가 서울성곽이다.
16:25
남산 정상에 출발한지 50분여, 숭례문에 도착했다.
2008년 2월 방화사건으로 옛모습을 잃어버린 숭례문은 현재 가림막을 쳐놓고 한참 복원공사중이다.
관리의 소홀함으로 국보1호의 장엄한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제대로된 복원을 통해 이전 모습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복원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숭례문에서 다음 코스로 가는 길을 찾는데 잠깐 헤맸다. 남지터라고 되있는데 이곳을 좀처럼 찾기가 힘들었다.
▲ 숭례문(남대문)은 복원 공사중
▲ 복원공사 현장..일부 서울성곽도 복원될 예정이다.
▲ 대한상공회의소앞 도로에 옛 서울성곽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 남대문(숭례문)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ㅇ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二千八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완전히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붕괴됨. 현재 복구공사로 2012년 12월 공사완료 예정임. 출처 : 문화재청
16:45
좀 헤맨 후 남지(남대문 남쪽에 있던 연못)터를 찾아, 다시 성곽 걷기를 시작했다. 남대문에서 염천교쪽으로 건널목을 건너고, 대한상공회의소 좌측길로 중앙일보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대한상공회의소부터 중앙일보로 가는 사이 옹벽에는 성곽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중앙일보 주차장 어디가 서소문터 위치라고 들었는데, 찾아볼 수는 없었다.
어느 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찾아보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중앙일보에서 서울시경찰청쪽으로 길을 건넌 후, 정동길 쪽을 방향을 틀었다.
배재공원을 지나 경향신문으로 향했다.
▲ 건물의 축대에 서울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 서소문(소덕문)
숭례문(崇禮門)과 돈의문(敦義門) 사이에 있던 서남향의 간문(間門)으로 소덕문(昭德門)·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이 원래의 위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는 성문과 문루(門樓)를 갖추어 소덕문이라고 했다. 1422년(세종 4) 주변의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할 때 소덕문도 함께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 석문, 즉 홍예(虹霓)를 개축할 때 왕이 문 이름을 고치라는 명령을 내렸고, 1744년에 소실된 문루를 완성한 뒤 소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곽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에 통행을 위한 홍예를 내었으며 그 위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구조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문루를 세웠다. 그 주위에는 벽돌로 담을 두르고 양 옆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17:15
강북삼성병원앞 돈의문(서대문)터를 지났다.
서울시에서는 2013년까지 4대문중 유일하게 멸실된 돈의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음..소덕문(서대문)도 복원될 수는 없을까 싶기도 하다.
돈의문터를 확인하고 강북삼성병원의 일부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경교장앞에 섰다.
경교장은 현재 관람이 제한되어 있지만, 올해 6월부터 정부수반유적복원의 일환으로 복원이 시작될 예정이다.
▲ 돈의문(서대문)터
▲ 경교장
○ 돈의문(서대문)
돈의문(敦義門)이라고도 한다. 원래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의주(義州)로 빠지는 의주대로와 접해 있어 중국 사신은 이 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 다른 문들과 함께 건축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해 숙정문(肅靖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되었다. 그 대신 약간 남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1422년(세종 4)에 다시 이 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을 새문안(지금의 신문로)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뒤 숙종 때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현재는 당시 사진을 통해 돌로 쌓은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虹霓門)이 있었고 그 위에 단층 우진각지붕의 문루(門樓)가 있었으며 주위에 낮은 담이 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다음 브래태니커 사전
17:25
경교장을 나와 서울시 교육청을 지나 월암근린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는 서울성곽의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공원 서쪽끝에는 홍난파 선생의 가옥이 남아 있다.
▲ 월암근린공원에 남아있는 서울성곽
▲ 월암근린공원끝에 있는 홍난파의 집
17:50
홍난파 가옥을 지나, 사직터널를 지났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지고 어두워져 인왕산 성곽 걷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독립문역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얼마전까지 독립문공원은 한창 공사중이었는데, 공사가 마무리 되어 있었다.
▲ 독립문
○ 독립문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인왕산 성곽길을 걷고 나면, 일단 서울성곽길 종주는 다하게 된다.
성곽길을 걷다보니 느낀 것은 길이 또 다른 길 들과 연결되고, 또 그길에는 길마다의 이야기가 또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종주를 마무리 하고 나서, 짧은 구간과 구간사이의 길들을 한 번 돌아보고 싶어졌다.
2010년에도 서울 걷기는 계속된다.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