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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쓰기/국제평화통신사 2009 in China

미래를 향한 어제와 오늘 찾기 답사 2

미래를 향한 어제와 오늘 찾기 답사 2

- 안중근의사의 꿈 동양평화를 찾다 -

 

1일차 : 2009.08.03

행선지 : 인천국제공항 대련공항 여순구 군항공원 여순감옥 여순구법원 대련시

 

오랜 행사준비 끝에 마침내 평화통신사 출발일이 밝았다.

6월달 답사차 갔을 때와는 달리, 일행들을 안내해야 하는 본행사를 맞이하자 과연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김포공항과 인천공항 사이에 공항철도를 이용해도 되었으나, 짐이 많아 갈아타기 귀찮음에 집근처에서 공항리무진버스를 이용했다.

아침 출근길에 늦을까 좀 일찍 출발했는데, 왠걸 도착예정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는 것이 아닌가.

공항에서 햄버거로 아침을 때우고, 일행을 기다렸다.

11:30분 대련행 남방항공 탑승관계(국제선은 1시간전에 탑승수속을 완료할 것을 권하고 있다.) 10시로 잡은 집결시간에 거의 모든 참가자가 도착했다.

미처 오지 못한 참가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위치를 물으니 30여분 소요된다고 해서, 먼저 온 참가자들부터 수속을 하고, 나를 포함한 스텝 둘이 남아 다른 참가자를 기다렸다.

통화와 달리 11:10분쯤 도착한 마지막 참가자와 겨우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로 이동했다.

이미 다른 참가자들은 탑승을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탑승 후, 2시간쯤 후 비행기는 목적지인 대련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중국은 북경표준시를 이용해서 우리보다 1시간 늦다. 그래서 공항에 도착해 로밍폰에 전원을 넣으니 시간은 1230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대련시는 동북성에서 큰 도시 중 하나이고, 최근 가장 빠른 성장(조선업이 중심 산업으로 우리가 조선업을 발전시킬 당시의 일반 화물선 등의 수주량이 무섭게 늘고 있다고 한다)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항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초라하다.


▲ 대련공항 전경
 

공항에는 지난 6월 답사시 많은 도움을 주셨던 황희면 선생님과 안내를 도와주실 최영관 선생님께서 나와 반겨주셨다.

6월 답사시에는 대련시에서 황희면 선생님을 만나, 본행사와 관련한 협의를 진행하는 이유로 이튿날 여순으로 갔었는데, 본행사에서는 간단한 인사 후 1250분경 바로 전세버스를 이용 여순으로 향했다.


▲ 여순으로 가는 전세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간단한 점심과 설명을 들었다.


대련시에서 여순(대련시에 포함되어 있다.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여순이 대련보다 규모가 더 컸었다고 한다)까지는 1시간여 소요된다.

버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최영관 선생님의 대련에 대한 소개와 우리가 가게 되는 여순 감옥과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소개들은 해당 답사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한다)

 

여순은 랴오둥반도(요동반도) 남쪽끝에 있으며, 1년내내 얼음이 얼지 않고 수심이 깊어 항구로서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청일전쟁(1984~95)이후 일본의 조차지였던 반환된 후 1898년에는 부동항을 원했던 러시아가 점령된 후 조차권(러시아인들이 부르던 이름은 포트아서)을 얻었다.

러일전쟁(1904-5)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주요공격목표가 되었는데, 이는 부동항을 원하는 러시아와 중국으로의 진출로를 원하는 일본의 충돌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러ㆍ일전쟁은 한만(조선과 만주)의 지배를 두고 두 열강의 충돌인 동시에 러시아는 프랑스 자본을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자본을 끼고 벌인 전쟁으로, 이 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열강사이에 실질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포츠머스 조약 :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의 중재로 이뤄진 러ㆍ일전쟁의 강화조약,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했다).

전쟁에서 고전하던 일본은 203고지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1일전투에서 8,000명의 희생)를 치룬 승리 후 승기를 잡는다. 일본의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노기 마레스카는 이 전쟁을 지휘하면 2만여명의 희생을 낳았다.

 

14:00경 여순 첫번째 답사지인 백옥산 리프트 탑승장에 도착했다. 여순 감옥과 구법원의 소개를 담당해주실 박용근 선생님이 나와 계셨다. 백옥산은 러ㆍ일전쟁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여순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군사요충지이다. 백옥산 답사를 통해 러ㆍ일전쟁의 의미와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첫 답사지로 백옥산를 선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답사일정상 리프트를 이용하는 것은 힘들어 6월답사시 이용했던 차량통행로를 이용하자 요구를 기사분이 거부했다. 버젓이 다른 버스(우리가 이용했던 버스보다 더 큰)가 우리 옆을 지나 올라가고 있음에도 도저히 말이 안 통했다.

30여분을 기사분과 신경전을 펼치다,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면 다른 일정에 문제가 될 것 같아 참가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근(10분거리)에 군항안변공원으로 답사지를 변경하여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 군항안변공원 사자상앞에서 설명을 듣다.

 

▲ 군항안변공원에서 바라본 여순구(여순항의 입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순은 천혜의 항구입지이다.

세계 5대 군항으로 뽑히는 여순군항은 동ㆍ서가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은폐 및 방풍이 좋고, 방어가 유리하다. 청에 의해 1882년부터 1890년 사이에 건설되어 청의 북양함대가 기지로 사용되었었다. 그리고 청ㆍ일전쟁으로 일본이 점령한 이후 앞서 여순에 대한 설명처럼 조차권이 옮겨갔다 러ㆍ일전쟁이후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1955년 소련이 철수한 이후에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군항으로 쓰이고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다.

군항안변공원은 군항 중 일부지역(백옥산의 남쪽 정면)에 위치한 수변공원으로 여순항으로 들어오는 입구인 여순구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는 한ㆍ청ㆍ일 동양세력이 일치단결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해야 함을 최상책으로 제시하며,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전한 것은 한ㆍ청이 일본을 도운 결과로, 전쟁의 결과 조선의 지배를 인정받은 것은 잘 못이며 결국 이는 일본이 패망으로 갈 것임을 경고했다.

이 주장은 이미 제국주의 나선 일본의 본질과 제국주의 열강사이의 합종연횡을 간과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에 일본이 한ㆍ중의 항일전쟁과 제국주의국가들과의 전쟁으로 패망하게 된 것은 사실이며, 현재의 지역 블록화가 경제를 넘어 국가통합 수준으로까지 발전하는 현실에서 아직도 동북아 혹은 아시아의 협력 정도가 미력하여 경제규모 등에 비해 세계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음을 볼 때 아직까지도 많은 의미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군항안변공원에서 러ㆍ일전쟁과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 등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와 30여분간의 답사를 마치고, 1일차 주 답사지인 여순감옥과 여순구법원을 향해 출발(15:10)했다.



덧붙임..백옥산 풍치지구

 

본 행사에서 현지사정으로 답사하지 못한 백옥산 풍치지구는 6월 사전답사시 살펴볼 수 있었다.

사전답사 첫날 대련시 도보 답사를 진행하고 나서, 황희면 선생님이 대련일대 답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눈 후, 다음날(17)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차량과 이문재 선생님과 여순으로 향했다.

사전답사시에는 여순 구법원(관동도독부)-여순감옥-백옥산 풍치지구 순으로 답사하고, 대련시로 돌아오는 중 지역의 민속박물관을 들러 대련으로 돌아왔다.


▲ 백옥탑


▲ 백옥산 정상에서 바라본 여순항과 여순구


▲ 군항안변공원에서 바라본 여순 


백옥산 정상에는 백옥탑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표충탑(
表忠塔)이라고 한다. 러ㆍ일전쟁을 승리한 기념으로 노기 마레스카와 도고 헤이하치로가 수천명의 중국 노역을 통해 건설한 탑이다.

높이 68.5m의 포탄 형상을 하고 있다. 표충탑은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진다는 의미였는데, 중국에 의해 1984년에 바이위타(백옥탑 白玉塔)로 개칭되었다.

 

백옥산 정상에서는 여순시 전경과 함께 여순항의 아름다움과 군항의 위풍당당함을 조망할 수 있다.